저자 한석훈은 십여 년간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교사지망생, 현직교사, 수많은 학생들을 상대해왔다. 그들을 만나면서 ‘좋은 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지 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선생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선생인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주된 논제이다.
프롤로그에서 ‘이 땅의 선생들은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고 있는가?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오늘날은 삶의 표면적 가치만 추구하고, 정신적 시야는 협소하며, 보다 포괄적인 인격으로 발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이 본래 영혼을 품은 존재임을 모른채 살아간다며, 참된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잃어버린 양이라 한다. 이는 이 땅의 선생들이 자기스스로 영혼을 돌보는 방법을 알아야 함을 밝힌다. 선생이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은 영혼의 성숙을 돕는 일이다.
제 1장 잠자는 학교, (학교는 무너지고 선생은 좌절한다)로 첫 장을 연다. 잠자는 학교로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잠을 자는 이유는 그들이 학교 공부는 진학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재미도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낮에 잠을 자서 체력을 비축해둬야 밤에 사설학원에 가서 진짜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학교의 선생들은 뾰족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재우는가, 교사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한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시장’의 ‘프로’들은 더 많은 노력을 수업에 쏟아붓는다. 그들은 공교육 체제 안에서 고용조건이 보장된 교사들보다 더 많은 ‘열성’으로 임한다며 더욱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이 시간이 오래걸리기 때문에, 빨리 진도를 나가서 더 많이 외우는게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에 효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로운 수업을 만들자는 이상주의적 대응은 초등학교를 넘어 올라갈수록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누구를 위한 수업일까? 오늘날의 공교육 체제는 ‘고객’이라 할 학생들의 약 30%에게만 유효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나머지 대다수가 학업 진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범생이들’만 우대해주고 그 밖의 학생들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므로 선생은 모든 아이들에게 손길을 뻗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 ‘구성주의식’ 교수법이라는 것이 소극적 교수자상을 전제로 하는데, 소극적 교사로서 학습을 이끄는 것은 종래의 적극적인 강의식 교수방식에 비해 결코 쉽지 않다. 토의식 수업은 사전준비도 철저히 해야 하고, 돌발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완전히 집중하여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실행하기가 매우 버겁다. 학생들을 위하는 이상주의식 대응방식은 선생에게 너무 많은 일을 부과한다.
저자는 인간의 삶이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수업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자기실현이란 육신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 머리가 계산하는 바대로 연명해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품고 있는 뜻을 삶에서 펼치는 과정이다. 영혼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고유한 영혼의 조재를 느낄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영혼의 뜻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뜻을 현실화시킬 재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대학생들은 자기실현을 알지 못한다. 그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대다수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기실현이 꼭 필요하다면 아이들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는 일은 선생의 몫이다. 허나 요즘 학교 실태를 보면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한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학부모들을 설득한다는 건 매우 비현실적이라 공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을 뚫을 묘수는 무엇일까? 책에 소개된 최윤아 선생은 방황했다. 대학생 때 교육학 시간에 배웠던 훌륭한 이론들이 대한민국의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비현실적인 이상일 따름이라 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반합의 통합을 위해서는 첫째, 삶이 아무리 고난을 들이민다 해도 이상을 바라는 내 마음만은 절실해야 한다. 둘째, 현실을 바윗돌처럼 꿈쩍도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변적임을 항상 깨어 있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맹종하지 않고 늘 내 관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셋째, 이상과 현실의 팽팽한 긴장과 모순 관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끌어갈 튼튼한 심신을 갖추고 주어진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교육자들의 헌신에 의해 세상이 느리게나마 조금씩이라도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합일에 대한 지속적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은 심신의 건강과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이었다.
참된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참된 자기가 아닌, 남들이 바라는 바에 의해서만 형성된 ’나‘가 어떻게 무엇이 자신을 진정으로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학생들을 자기실현의 길로 인도해줘야 하는 모든 선생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자신의 길도 알지 못하는 선생이 어찌 남들을 인도할 수 있겠나?
제 2장은 선생 일을 할 준비가 되었나? (선생 일, 쉽지 않다)로 시작된다.
영광스러운 직업선호도 1위 교사.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보여준다.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유치원교사부터 중등 교사까지 양성하는 사범대학과, 교원대학을 비롯해 여러 교육대학원에 몰리거나 대학에 설치된 교직과정을 이수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교직을 선호하는가? 첫째, 교직은 일반 공무원 못지 않게 대표적인 안전 직종이다. 직업적 안정성이라는 점이다. 둘째,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과 잘 맞는다는 믿음. 셋째, 교직의 남다른 사명감이다. 먼저 직업적 안정성 추구라는 동기부터 살펴보자. 그저 봉급과 연금만 바라거나 일등 신붓감이 되기 위해 교사가 된 이들이 대부분이라면, 그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불쌍하다. 두 번째 동기는 교직의 소질에 의해 동기가 유발된 사람으로, 실제 선생이 돼서도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동기는 사명감에 대해서 말한다. 선생이 되기위한 중요한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지만 이상이 너무 높을 경우 현실에 직면했을 때 쉽게 좌절할 수 있다며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인 동기나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동기, 둘다 문제가 있다.
교직의 안정성이라는 현실적 이유로 선생이 된 이는 자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상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이상주의적 이유로 선생이 된이는 그 이상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선생, 영혼으로 혁명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장에서는, 한국의 엘리트주의와 경쟁주의 교육의 처참함을 말한다. 남을 짓밟고 1등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교육이 그렇게 변화해야 한다. 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과업의 주체는 선생이 아닐까?
제 3장, 지식과 감성, 그 너머 (선생 일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는 고등학교 영어교사 서유진을 에를 들어 자기인식이 충분치 않은 문제점을 말해준다. 엘리트로 살아온 그녀는 평균적인 교사이지만, 그녀의 자기인식이 부족한 것은 그때까지의 삶이 충분히 자기실현이 지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도 타인의 기대에 더 맞춰 자신의 삶을 계획해온 것은 자기인식이 부족한 점이다. 자기실현은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도 천착했던 개념이다. 그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한 생리적, 본능적 욕구와 사회에 소속되기 위한 인정 욕구를 뛰어넘는 자기실현 욕구를 품고 있다. 인간이란 최상위 욕구인 자기실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봤다.
재능과 개성은 진정한 나, 참된 자기와 연결돼 있다. 자기실현은 이러한 재능과 개성의 요청에 응답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만 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선생으로서 다양한 인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자신의 자기실현 여정에 있어서도 장애요인이 된다. 선생이 다양한 학생들과 제대로 의사소통하고 그들과 인간적인 감정을 나누려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일부분에 불과한 모범생 콤플렉스만 부여안고 아이들을 바라보면, 모범생상에 맞지 않는 수많은 아이들을 이해 할 수 없다.
선생은 선생으로서 행복해야 한다. 자신의 일을 통해 자기실현을 추구해야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 성인기 삶의 대부분을 학교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하고 자신만의 개성의 꽃을 피운다는 것이 답이다. 선생 일을 통해 본래의 자기로서 있기를 원하는 존재론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자기실현과 본질적 동기유발이 선생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선생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통하여 진정한 만족과 행복에 이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 일에 자신의 영혼을 바칠 때, 그 일에서 최상의 성과를 뽑아내고 자신도 행복해 질 것이다.
제 4장, 선생, 멀티플레이어(시대가 선생에게 요구하는 것들)
20세기에 선생상은 다양하게 변화해왔고, 각각의 선생상은 학교교육에 대한 시대의 요청과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부응하도록 학교 교육이 개혁돼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는 21세기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 바로 리더쉽을 발휘하는 선생상이다. 과거의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의 장악력과는 다르다.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조직 구성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자발적으로 리더의 요청에 부응하고 헌신하도록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리더의 사람됨 또는 품성에서 나오는 영향력이다. 문화적 리더쉽과 변혁적 리더쉽을 제시한다.
학자적 선생상, 프로페셔널 선생상, 변혁적 지식인 선생상, 학습 촉진 선생상이 있으며 그 시각들의 제한을 극복하려는 대안으로 리더십 이론-변혁적 리더십 이론이 제시된다.
제 5장, 지식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다. 영혼의 성숙을 종교의 본질인 영성의 구동과 연관 시켜보면, 학생의 인지적, 육체적, 사회적 발육을 돕는데 국한된 현대의 선생상과 비교해 영혼의성숙을 돕는 선생상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학생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 전체의 성숙과 실현을 이끄는, 포괄적 책무를 진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선생이 선생일을 대하는 태도가 주요하다. 어떤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일을 대하느냐에 따라 현실 자체와 자신도 변화한다.
영혼의 성숙을 돕는 선생상에는 학생이 언젠가 궁극으로 영혼의 꽃을 피우고 자기실현을 이룬 경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학생의 존재의 목적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믿음이 깔려있다.
제 6장, 오래된 미래 (영혼의 성숙을 돕는 선생상)에서 저자는 영혼의 성숙을 돕는 선생상은 기존의 어떤 종교와도 관련이 없고, 전통적 의미의 종교적 헌신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인식의 성숙 과정이 진정한 자기 또는 참된 나의 실현에 여정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깊은 인식을 모색하고자 하는 열망과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 등을 영성이라고 한다.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을 위한 존재가 돼라. 자기의 본 모습대로 학생들에게 교수활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존재론적 욕망에 불을 지피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학습자와 선생의 사람됨, 존재론적 수준을 강조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교육자롯 표면적으로 하는 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자로서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선생 일을 누가 하느냐가 핵심인 것 같다. 흥덕고등학교의 한 선생은, 교사 스스로가 바뀌지 않는 한 학생들이 변화하기는 힘들다고 다큐멘터리에서 토로한적이 있다. 방법에 앞서 존재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세세한 방법들을 배우고 익히기 이전에, 내가 어떤 의식과 마음가짐을 가진 선생인가를 되묻는 것이 선결과제다.
융의 조언에서, 이삼십대에는 소유론적 욕망의 충족만으로도 정신없이 즐겁게 살아 갈수 있다. 그것의 허망함을 사람은 삼십대 중후반부터 느끼게 된다. 이를 흔히들 중년의 위기라고 부른다. 이것은 사회문화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의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다. 이때부터 사회적으로 치장해온 자신의 외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깊숙한 내면과 대면해야 한다. 참된 자기를 소외시키거나 무시할 때, 나라는 존재의 본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사람의 인격 전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우선 자신과 사이가 나빠지고, 그래서 타인들과도 사이가 나빠지며, 세상과 조화롭고 아름답게 관계를 맺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 결국 불행해지고 파멸한다.
제대로 살고 싶으면 진정한 자기를 알아야하고, 그 자기를 살려내야 한다. 치열한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그러니 존재론적 욕망에 불을 지펴라.
제 6장, 행복을 향한 걸음(학생, 세상, 선생 자신의 행복)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 자연이 담겨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인간 한사람, 한사람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인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지구라는 자연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연에 담겨 있는 우리들 모두는 그 근원에서 볼 때 그가 속해 있는 사회보다 훨씬 큰, 문명보다 훨씬 원초적인 우주와 맞닿아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소비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소유론적 욕망에 빠져 침울한 삶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재능과 성향을 계발하여 자기실현을 해보려는 존재론적 욕망을 꽃피우는 사회가 될 때, 비로소 현명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우리 문명이 보다 이타적이고 공존을 지향하는 쪽으로 변화해갈 것이다. 학생들의 마음에 선한 꽃을 피울 씨를 뿌린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귀하에 여기고, 그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쏟아붓는 것을 이를 따름이다.
세상은 확실히 변했다. 아무리 현대화, 산업화와 독점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해도 지금 이 시대가 역사상 인구 대비 굶어죽는 사람의 수가 가장 적고 인명을 존중하며 인권을 보호하는 시대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만큼 세상은 나아지고 변화하고 있다. 어찌 우리의 교육 현실이라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 모양, 이 꼴로 남아 있을거라 할 수 있는가?
세상은 변할 것이고, 우리의 교육을 둘러싼 역학도 변할 것이며, 그 변화의 물꼬를 어느 방향으로 트는가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살아남아 발전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현실이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임을 알고 수용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쓸모 있게 될 그 날을 어떻게 기다릴까? 곧,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을 온전히 삶으로써 그리할 수 있다. 지금 주어진 이 순간에 내 전부를 바칠 때, 그 헌신이 지속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노은 경지에 도달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무 앞을
계산하고 계획하여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가는 것 보다, 대강의 미래 계획만 세운 뒤, 지금 이 순간에 최상의 나를 바치며 지금 여기에서 사는 데 있다. 이런 삶은 선생으로서 내 앞의 학생들에게 내 능력의 최상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런 몰입의 지속이 나의 내면을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자기실현의 도정에 오를 수 있게 해준다.
후대를 키우는 소임을 맡은 선생의 일이란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행복한 일인가?
나는 학생의 영혼의 성숙을 돕는 선생이다. 선생은 아이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돌봐줘야 하고, 궁극적으로 영혼의 성숙을 도와주는 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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